오토모노 야카모치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토모노 야카모치는 7~8세기 일본의 씨족인 오토모 씨 출신으로, 야마토 시대의 무관이자 관료였다. 그는 여러 지방의 국사를 역임했으며, 시인이자 《만엽집》의 최종 편찬자로 알려져 있다. 785년 무쓰국에서 쇼군으로 근무하던 중 익사했으며, 사후 후지와라노 타네츠구 암살 사건 연루 의혹으로 불명예를 안고 파문되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만엽집》에 수록된 473수의 와카를 통해 나타나며, 그의 노래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군가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의 동상은 다카오카역 등에 설치되어 있으며, 소설, 만화, 연극 등 다양한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718년 출생 - 고켄 천황
고켄 천황은 쇼무 천황의 딸로, 일본 제45대 및 제48대 천황으로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후원을 받다가 준닌 천황과의 갈등 후 재즉위하여 쇼토쿠 천황으로 불렸으며, 재위 기간 동안 정치적 혼란과 불교 중시 정책을 겪고 백만탑 다라니 제작을 후원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으나 통치 방식에 대한 비판과 후계자 문제 논란이 있다. - 718년 출생 - 콘스탄티노스 5세
콘스탄티노스 5세는 레오 3세의 아들이자 741년부터 775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을 통치한 황제로, 성상 파괴 운동을 지지하고 아랍 및 불가리아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며 행정 및 군사 개혁을 추진했다. - 오토모씨 (신별) -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는 7세기 후반에 태어나 8세기에 활동한 일본의 여성으로, 유력 가문 출신이며 호즈미 친왕 등과 관계를 맺고 만엽집에 작품을 남긴 시인이자 오토모 씨 가문의 수장 역할을 했다. - 오토모씨 (신별) - 오토모노 사테히코
오토모노 사테히코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한반도에서의 군사 활동과 관련된 기록이 있으며, 신라와 고구려를 공격하고 백제를 구원했으며,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묘사되며, 후손으로는 오토모노 무라치 씨족 등이 있고, 와카야마 시에는 그를 모시는 신사가 있다. - 785년 사망 - 사와라 친왕
사와라 친왕은 나라 시대의 황족이자 간무 천황의 동생으로, 후지와라노 타네츠구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 중 사망 후 스도 천황으로 추존되었으며, 그의 죽음은 미스터리로 남아 원령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 785년 사망 - 안진경 (709년)
안진경은 당나라 시대의 강직한 문신이자 뛰어난 서예가로, 안사의 난 때 의용군을 일으켜 반군에 맞서 싸웠으며, 그의 서체인 안체는 한국과 일본 서예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토모노 야카모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오토모노 야카모치 |
일본어 표기 | 大伴 家持 |
로마자 표기 | Ōtomo no Yakamochi |
출생 | 718년 4월 2일 |
사망 | 785년 5월 1일 |
사망 장소 | 무쓰국 |
직업 | 정치가, 무사, 시인 |
정치 경력 | |
관위 | 종3위 주나곤 |
섬긴 천황 | '쇼무 천황 → 고켄 천황 → 준닌 천황 → 쇼토쿠 천황 → 고닌 천황 → 간무 천황' |
가문 | |
씨족 | 오토모 씨 |
부모 | '아버지: 오토모노 타비토, 어머니: 다니히노 이라쓰메' |
형제자매 | '야카모치, 오토모노 후미모치, 다카다마로, 루메노이라쓰메' |
배우자 |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오이라쓰메 |
자녀 | 오토모노 나가누시 |
작품 | |
대표 작품 | 만요슈 |
관련 인물 | 36가선 |
2. 오토모 씨
오토모 씨大伴氏|오토모 우지일본어는 5세기부터 9세기까지 번성했던 강력한 씨족이다.
오토모노 야카모치는 나라 시대 후기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가인으로, 특히 《만엽집》 편찬에 깊이 관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생애는 명문 오토모 씨 가문의 일원으로서 관직 생활과 정치적 부침으로 점철되었다.
아마테라스의 손자인 니니기노미코토가 천손강림할 때 선도(先導) 역할을 했다고 전해지는 아메노오시히노미코토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모노노베 씨와 함께 야마토 왕국의 군사 업무를 담당했으며, 정치적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3. 생애
초기에는 내사인, 궁내소보 등을 거쳐 746년 엣추노카미로 부임하여 약 5년간 지방관으로 활동하며 많은 와카를 남겼다. 751년 중앙으로 복귀하여 쇼나곤, 병부소보 등을 역임했고, 755년 나니와에서의 방인(防人) 검교 경험은 《만엽집》의 방인가(防人歌) 수집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관직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757년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에는 직접 연루되지 않았으나, 그 여파로 758년 이나바노카미로 전출되었다. 763년에는 권력자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처벌은 면했지만,[8] 이듬해 사쓰마노카미로 좌천되었다.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764년) 이후 쇼토쿠 천황 치세에는 주로 규슈 지역에서 활동했다.
770년 고닌 천황 즉위 후 중앙 정계에 복귀하여 사추벤, 식부대보, 위문독 등 요직을 거치며 순조롭게 승진하여 780년 참의에 임명되어 공경의 반열에 올랐고, 781년에는 종3위에 이르렀다.
간무 천황 치세 초기인 782년 히카미노 가와쓰구의 난 연루 혐의로 잠시 실각했으나 곧 복직하여 783년 주나곤으로 승진하고, 784년에는 지세쓰세이토쇼군으로서 에미시 정벌을 이끌었다.
785년 8월 28일, 향년 68세로 사망했다. 사망 장소는 무쓰국 또는 수도 헤이조쿄로 추정된다.[10] 그러나 사망 직후 후지와라노 다네쓰구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관적이 박탈되고 매장도 금지되는 추벌(追罰)을 당했다. 그의 명예는 사후 20여 년이 지난 다이도(大同) 3년(806년)에야 회복되어 종3위 관위가 복권되었다.
3. 1. 출생과 가계
오토모노 야카모치는 718년경 오토모노 타비토(大伴旅人)와 다지히노 이라쓰메(丹比郎女)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속한 오토모 씨(大伴氏)는 5세기부터 9세기까지 번성했던 강력한 씨족 가문으로,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아마테라스의 손자 니니기노 미코토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고 전해지는 아메노오시히노 미코토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야마토 시대에는 모노노베 씨와 함께 조정의 군사 업무를 담당했으며, 정치적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친 무관이자 관료 가문이었다.[1]
야카모치의 고모는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大伴坂上郎女)로, 그녀는 호즈미 황자(穂積皇子)의 총애를 받은 유명한 시인이기도 했다.[1] 아버지 오토모노 타비토가 731년에 사망하자[2], 야카모치는 오토모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3]
관계 | 이름 |
---|---|
할아버지 | 오토모노 야스마로 [1] |
아버지 | 오토모노 타비토 [1] |
어머니 | 다지히노 이라쓰메 |
고모 |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 [1] |
부인 | 사카노우에노 오이라쓰메 [26] |
아들 | 오토모노 나가누시 |
3. 2. 초기 관직 생활
덴표(天平) 10년(738년)에 내사인(內舍人)을 맡았던 기록이 있으며,[16] 덴표 12년(740년) 후지와라노 히로쓰구의 난 평정을 기원하기 위한 쇼무 천황의 이세국 행차에 동행했다. 덴표 17년(745년)에는 종5위하(従五位下)에 서위되었다.이듬해인 덴표 18년(746년) 3월에는 궁내소보(宮内少輔)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6월 21일에는 엣추국의 카미(守)인 엣추노카미(越中守)로 임명되어 지방관으로 부임했다.[7] 엣추노카미로 재직하는 동안, 덴표 21년(749년)에는 종5위상(従五位上)으로 승진했으며, 덴표쇼호 3년(751년)까지 엣추국에 머물면서 220여 수에 달하는 와카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3. 3. 엣추노카미 시절
덴표 17년(745년)에 종5위하 관위를 받았으며, 이듬해인 덴표 18년(746년) 3월에는 궁내소보(宮内少輔)를 거쳐 같은 해 6월 21일에 엣추노카미(越中守)로 임명되어 지방관으로 부임했다.[7] 그는 덴표쇼호(天平勝寶) 3년(751년) 7월 17일 쇼나곤(少納言)에 임명되어 수도로 돌아올 때까지[7] 엣추노쿠니를 다스렸다. 부임 중이던 덴표 21년(749년)에는 종5위상으로 승진했다. 이 시기 동안 그는 220여 수에 달하는 와카(和歌)를 지었으며,[1] 이 노래들은 《만엽집》(万葉集)에 다수 수록되어 있다.3. 4. 중앙 관직 복귀와 정치적 격변
덴표쇼호 3년(751년) 7월 17일, 쇼나곤에 임명되어 수도로 돌아왔다.[7] 이후 덴표쇼호 6년(754년)에는 병부소보(兵部少輔)로 임명되었고, 덴표쇼호 9세(757년)에는 효부다이후(兵部大輔)를 맡는 등 고켄 천황 치세 후반기에는 병부성의 차관직을 역임했다. 이 기간 중인 덴표쇼호 7세(755년), 나니와에서 방인(防人)의 검교를 맡았는데, 이때 방인들과의 만남은 《만엽집》의 방인가(防人歌) 수집으로 이어졌다.덴표호지 원년(757년)에 발생한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에서는 오토모노 이케누시, 오토모노 고마로, 오토모노 고시베 등 일족 다수가 처벌받았으나, 야카모치는 모반에 직접 가담하지 않아 화를 면했다. 그러나 이 난의 영향 때문인지 이듬해인 덴표호지 2년(758년) 이나바노카미(因幡守)로 임명되어 다시 지방관으로 전출되었다. 덴표호지 3년(759년) 정월, 이나바 국부(國府)에서 《만엽집》의 마지막 노래를 지었다.
덴표호지 6년(762년) 신부다이후(信部大輔)에 임명되어 중앙 관직에 복귀했지만, 당시 준닌 천황 치세 하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태사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에 대항하여 후지와라노 요시쓰구, 이소노카미노 야카쓰구, 사에키노 이마에미시 등과 함께 암살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밀고로 계획이 발각되어 덴표호지 7년(763년) 네 사람은 체포되었다. 이때 후지와라노 요시쓰구가 단독 범행임을 주장하여 야카모치는 처벌을 면했지만[8], 이듬해인 덴표호지 8년(764년) 정월 사쓰마노카미(薩摩守)로 좌천되는 보복성 인사를 당했다.
규슈로 내려갔기 때문에 같은 해 9월에 일어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 당시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후 진고케이운 원년(767년) 다자이쇼니(大宰少弐)로 옮겨, 쇼토쿠 천황 치세 동안에는 주로 규슈 지방의 지방관을 지냈다.
진고케이운 4년(770년) 9월, 쇼토쿠 천황이 승하하자 사추벤(左中弁) 겸 나카쓰카사다이후(中務大輔)라는 요직에 발탁되었고, 11월 고닌 천황이 즉위하면서 21년 만에 정5위하로 승진했다. 고닌 천황 치세 동안 야카모치는 식부대보(式部大輔), 사쿄노다이부(左京大夫), 에몬노카미(衛門督) 등 수도의 주요 관직과 가즈사, 이세와 같은 대국(大國)의 카미(守)를 역임하며 순조롭게 경력을 쌓아나갔다. 호키(寶龜) 2년(771년)에는 종4위하, 호키 8년(777년) 종4위상, 호키 9년(778년) 정4위하로 순조롭게 승진했다.
호키 11년(780년)에는 참의(参議)에 임명되어 공경의 반열에 올랐고, 이듬해인 덴오(天應) 원년(781년)에는 종3위에 서위되었다.
간무 천황이 즉위한 후, 덴오(天應) 2년(782년) 정월에는 히카미노 가와쓰구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아 잠시 관직을 박탈당하고 수도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석 달 뒤인 4월에 사면되어 참의로 복직했고, 이듬해인 엔랴쿠 2년(783년)에는 선임 참의였던 후지와라노 고구로마로, 후지와라노 이에요리를 제치고 주나곤으로 승진했다. 또한 황태자 사와라 친왕(早良親王)의 하루미야노다이부(春宮大夫)도 겸임했다. 엔랴쿠 3년(784년)에는 지세쓰세이토쇼군(持節征東将軍)에 임명되어 에미시 정벌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듬해인 엔랴쿠 4년(785년) 8월 28일, 겸임하던 무쓰안찰사(陸奥按察使) 겸 지세쓰세이토쇼군의 직무 수행을 위해 머무르고 있던 무쓰국에서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설[10]과 요닌의 관직으로 수도에 있었다는 설이 있다. 사망지에 대해서도 헤이조쿄 설과 다가조 설이 나뉜다.
사망 직후, 나가오카쿄 축조 중에 일어난 후지와라노 다네쓰구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아 시신 매장이 허락되지 않고 관적에서 제명되는 추벌(追罰)을 당했다. 아들 나가누시(永主)도 오키국으로 유배당했다. 야카모치는 사망한 지 20여 년이 지난 다이도(大同) 3년(806년)에야 사면되어 종3위 관위를 회복했다. 역사학자 하세베 쇼시는 야카모치가 다네쓰구 암살 1개월 후에 사망했음에도 매장되지 않은 점을 들어 무쓰 국 체류 중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다네쓰구 암살 사건 연루에 의문을 제기한다.[11]
3. 5. 지방관 전출과 복귀
덴표호지 원년(757년)에 발생한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그 영향으로, 이듬해 덴표호지 2년(758년) 이나바노카미(因幡守)에 임명되어 다시 지방관으로 전출되었다.[7] 덴표호지 3년(759년) 정월에는 이나바 국부에서 《만요슈》의 마지막 와카를 지었으며, 이는 《만요슈》의 가장 마지막에 실린 노래가 되었다.덴표호지 6년(762년)에는 신부다이후(神部大輔)에 임명되어 중앙 관직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당시 권세를 떨치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에 대해, 후지와라노 요시쓰구, 이소노카미노 야카쓰구, 사에키노 이마에미시와 함께 암살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밀고로 인해 덴표호지 7년(763년)에 발각되어 네 사람은 체포되었으나, 후지와라노 요시쓰구가 단독 범행을 주장하여 야카모치는 죄를 묻지 않았다.[8] 하지만 이듬해인 덴표호지 8년(764년) 정월, 사쓰마노카미(薩摩守)로 좌천되는 보복성 인사를 받았다.
규슈 지방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같은 해 9월에 발생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 당시의 동향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후 진고케이운 원년(767년)에는 다자이쇼니(大宰少弐)로 전임되어, 쇼토쿠 천황 치세(쇼토쿠조) 동안에는 주로 규슈 지방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3. 6. 고닌 천황 시대
진고케이운 4년(770년) 쇼토쿠(稱德) 천황이 승하한 뒤, 오토모노 야카모치는 사추벤(左中弁) 겸 중무대보(中務大輔)라는 요직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1월, 고닌 천황이 즉위하면서 야카모치는 21년 만에 승진하여 정5위하의 관위를 받았다.고닌 천황 치세 동안 야카모치는 식부대보(式部大輔), 좌경대부(左京大夫)],
3. 7. 간무 천황 시대와 죽음
간무(桓武) 천황 치세인 덴오(天應) 2년(782년) 정월, 야카모치는 황족 히카미노 가와쓰기(氷上川繼)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 수도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석 달 뒤인 같은 해 4월에 사면되어 참의로 복직하였다. 이듬해인 엔랴쿠 2년(783년)에는 선임 참의들을 제치고 주나곤으로 승진했으며, 황태자 사와라 친왕의 교육 담당인 하루미야노다이부도 겸임했다.엔랴쿠 3년(784년), 지세쓰세이토쇼군(持節征東将軍)에 임명되어 에미시 정벌의 책임자가 되었다. 엔랴쿠 4년(785년) 4월에는 무쓰(陸奧) 국에 임시로 설치했던 다카군(多賀郡)과 가이조군(開上郡)을 정식 군으로 승격시키고 관리를 상주시킬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허락받았다.[9]
같은 해 8월 28일, 야카모치는 향년 68세로 사망했다. 최종 관위는 종3위 주나곤 겸 하루미야노다이부, 무쓰안찰사(陸奥按察使), 진수부장군(鎮守府将軍)이었다. 사망 장소에 대해서는 겸임하고 있던 무쓰안찰사 및 지세쓰세이토쇼군의 직무 수행을 위해 머무르고 있던 무쓰국(다가조 설)이라는 설과, 헤이조쿄에 있었다는 설이 있다.[10]
사망 직후, 당시 건설 중이던 나가오카쿄(長岡京)에서 후지와라노 다네쓰구(藤原種繼) 암살 사건이 발생하자, 야카모치 또한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로 인해 그의 시신은 매장이 허락되지 않았고 관적에서도 이름이 삭제되는 추벌(追罰)을 받았다. 역사학자 하세베 쇼시(長谷部将司)는 다네쓰구 암살이 야카모치 사망 약 1개월 후에 일어났음에도 매장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을 들어, 야카모치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무쓰국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며, 따라서 다네쓰구 암살 사건 연루설에 의문을 제기한다.[11] 야카모치의 아들 나가누시(永主) 역시 이 사건에 연좌되어 오키(隱岐) 국으로 유배되었다.
야카모치는 사망한 지 20여 년이 지난 다이도(大同) 3년(806년)에야 사면되어 종3위 관위를 회복했다.
4. 《만엽집(万葉集)》 편찬
오토모노 야카모치는 일본 최초의 시가집인 《만엽집》(万葉集)의 편찬자 또는 최종 편찬자로 여겨진다.[2] 그가 지은 와카(和歌)는 장가(長歌)와 단가(短歌)를 합쳐 총 473수[1](다른 자료에서는 약 481수[1])가 《만엽집》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만엽집》 전체 분량의 1할이 넘는 상당한 양이다. 이러한 사실은 야카모치가 《만엽집》 편찬에 깊이 관여했거나 최종적으로 정리했을 것이라는 추정의 주요 근거가 된다. 특히 《만엽집》의 권17부터 권20까지는 야카모치의 개인 시집, 즉 사집(私集)의 성격을 띤다는 평가도 있다. 야카모치는 시를 직접 짓는 것 외에도 수많은 고대의 시와 민속 자료를 베껴 쓰고, 고치고, 다시 쓰는 작업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수록된 473수의 노래 중 223수는 그가 엣추국(越中国) 태수(고쿠시)로 재임하던 시기에 지은 것이다.[12] 《만엽집》에 실린 마지막 노래는 덴표호지 3년(759년) 정월에 야카모치가 지은 "새로운 해의 시작, 초봄의 오늘 내리는 눈이 더욱 겹쳐 좋은 일(新しき年の始の初春の今日降る雪のいや重け吉事)"(권20-4516)이다. 이 노래를 지었을 때 야카모치의 나이는 42세였다.
《만엽집》 외에도 그의 작품은 후대에 편찬된 시가집에 실렸다. 덴노의 명으로 편찬된 칙선화가집(勅撰和歌集) 중에서는 《습유화가집(拾遺和歌集)》에 3수가 실린 것을 시작으로 총 60수가 여러 칙선집에 채택되었다.[13] 다만, 유명한 《백인일수(百人一首)》에 실린 그의 노래 "까치가 건너는 다리에 내린 서리의 흰빛을 보면 밤이 깊어가는구나"는 《만엽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한편, 야카모치의 작품 중 하나인 '바다에 가면'(원제: 海ゆかば, 《만엽집》 권18의 '가리쿠오쿠슈츠킨쇼서가'에 기반)[25]은 후대에 전혀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태평양 전쟁 시기, 이 노래는 노부토키 기요시(信時潔)에 의해 군가로 작곡되어 '바다여 가라(海行かば)'라는 제목으로 널리 불렸다.[5] 특히 대본영 발표 시 옥쇄를 독려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전주곡으로 사용되는 등, 일본 군국주의가 고대 문화를 자신들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고 병사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데 악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된다.[5]
5. 작품 세계
오토모노 야카모치가 지은 와카는 장가(長歌)와 단가(短歌)를 합쳐 총 473수가 《만요슈》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는 《만요슈》 전체 분량의 10%가 넘는 상당한 양이다.[1] 이 때문에 야카모치가 《만요슈》의 편찬에 깊이 관여했거나 최종 편찬자였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2] 그는 《만요슈》에 자신의 시를 다수 남겼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고대 시와 민요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데에도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은 당대 가장 뛰어나고 영향력 있는 것으로 평가받으며, 후대의 《신찬와카슈》 편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야카모치의 와카는 자연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인간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만요슈》에 실린 473수 중 223수는 그가 엣추국(越中国)에서 관리로 근무하던 시절에 지은 노래이다.[12] 《만요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노래(권20-4516)는 덴표호지 3년(759년) 정월 초하루에 야카모치가 읊은 것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 관직은 종5위상 이나바노카미였다. 그가 정5위에 오른 것은 이로부터 11년 뒤의 일이다.
《만요슈》 외에도 그의 작품은 여러 칙선 와카집에 실려 전해진다. 《습유화가집》(拾遺和歌集)에 3수가 실린 것을 시작으로, 총 60수의 와카가 덴노의 명으로 편찬된 와카집에 수록되었다.[13][24] 유명한 《백인일수》에 실린 "까치가 건너는 다리에 내린 서리의 흰빛을 보면 밤이 깊어가는구나(かささぎの 渡せる橋に おく霜の 白きを見れば 夜ぞ更けにける)"라는 노래는 정작 《만요슈》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아사카노미코(安積皇子)를 위한 추도시(반카)를 짓기도 했다.
그의 노래 중 "바다에 가면"(원제: 海ゆかば|우미 유카바일본어)[25]은 《만요슈》 권18에 실린 "가리쿠오쿠슈츠킨쇼서가(賀陸奥國出金詔書歌)"에 근거한 것으로, 태평양 전쟁 시기에 노부토키 기요시에 의해 곡이 붙여져 일본군의 군가로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1937년 전쟁 발발 당시 해군가로 채택되어 수병들의 출정가로 불렸으며,[5] 옥쇄를 미화하고 장려하는 노래로 불리기도 했다. 전쟁 중에는 대본영 발표의 전주곡으로 사용되었고, 사실상 일본의 두 번째 국가처럼 여겨졌다.[5] 이는 일본 군부가 자신들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유 문화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된다.[5]
6. 계보
wikitext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오토모노 다비토(大伴旅人) | |
어머니 | 다지히노 이라쓰메(丹比郎女) | |
부인 | 사카노우에노 오이라쓰메(坂上大嬢) | [26] |
아들 | 오토모노 나가누시(大伴永主) | 어머니는 사카노우에노 오이라쓰메 또는 불명 |
7. 오토모노 야카모치 동상
1981년 제1회 다카오카 만요 축제를 기념하여 다카오카역 북쪽 출구 역전 광장에 오토모노 야카모치의 동상이 세워졌다.[14] 이후 JR 다카오카역 주변 정비 사업으로 동상이 잠시 철거되어 수리될 때, 야카모치가 관리로 부임했던 고시노쿠니 국부가 있던 후시키 지역으로 동상을 옮기자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결국 다카오카역의 상징으로서 원래 자리인 역 북쪽 출구에 다시 설치되었다.[14]
또한, 야카모치가 사쓰마 국사로 부임했던 가고시마현 사쓰마센다이시에도 그의 동상이 있다. 센다이 역사 자료관 근처와 센다이역 앞에 "미래에 전하는 역사상" 중 하나로 세워져 있다.[15]
8. 오토모노 야카모치를 소재로 한 작품
(내용 없음)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Harvard University Press
[2]
서적
Traditional Japanese Literature: An Anthology, Beginnings to 1600
Columbia University Press
[3]
서적
A History of Japanese Literature: From the Man'yōshū to Modern Times
Japan Library
[4]
서적
Man'yōshū (Book 15): A New Translation Containing the Original Text, Kana Transliteration, Romanization, Glossing and Commentary
Global Oriental
[5]
서적
Certain Victory: Images of World War II in the Japanese Media: Images of World War II in the Japanese Media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5-06-01
[6]
서적
公卿補任
781
[7]
간행물
高岡市市制100年記念誌 たかおか -歴史との出会い-
高岡市
1991-12
[8]
서적
続日本紀
780-09-18
[9]
서적
続日本紀
783-04-07
[10]
서적
公卿補任
[11]
서적
〈崇道天皇〉の成立とその展開―九世紀における〈天皇〉の位相―
岩田書院
[12]
웹사이트
2「北陸らしさ」を備えた地域資源の掘り起こし
https://www.mlit.go.[...]
国土交通省
2021-11-10
[13]
서적
勅撰作者部類
[14]
뉴스
家持像 駅北口に帰る 高岡市、周辺整備で方針
https://web.archive.[...]
2013-12-13
[15]
웹사이트
万葉の川筋散策の路(万葉の散歩道)
https://satsumasenda[...]
2019-06-29
[16]
서적
万葉集
[17]
서적
万葉集
[18]
서적
続日本紀
783-08-28
[19]
서적
万葉集
[20]
서적
大伴家持の娘
和泉書房
[21]
웹사이트
「万葉集をつくった男」大伴家持を描いた小説を緊急発売へ
https://kadobun.jp/n[...]
2021-04-20
[22]
웹사이트
高岡市/大伴家持生誕1300年記念事業演劇公演
https://www.city.tak[...]
2021-04-20
[23]
웹사이트
朗読劇「やかもち」和泉元彌が万葉集の編纂者・大伴家持、池上季実子がその叔母に
https://natalie.mu/s[...]
2021-04-20
[24]
문서
천황의 명으로 특별히 편집된 것을 말한다.
[25]
문서
원래는 무쓰노카미였던 구다라노고니키시 쿄후쿠(百濟王敬福)가 무쓰노쿠니에서 황금을 발견한 것을 경축하기 위해서 야카모치 자신이 읊었던 노래의 일부분이었다. 그 중 군가의 가사로 쓰인 대목은 "바다에 가면 젖은 송장, 산에 가면 잡초 무성한 송장, 대군(大君)의 곁에서 죽을 수 있다면 죽어도 편안히 죽으리라(海行かば水漬く屍 山行かば草生す屍 大君の辺にこそ死なめ かへり見はせじ)"이다.
[26]
문서
일명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大伴坂上大嬢). 덴표 4년(732년)무렵과 덴표 11년(739년)무렵에 야카모치와 단가를 주고 받았던 것이 알려져 있으며, 야카모치의 정실이기는 하지만 야카모치의 아들인 나가누시의 생모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